시험결혼의 풍속은 널리 유럽에 퍼져있는 결혼형태였었다. 그 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고대 그리스에서 발생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많이 찾아볼 수가 있다. 또한 북아메리카의 인디안이나 필리핀 등의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성행하고 있었으며, 인간생활의 실리적인 지혜가 낳은 합리주의적인 결혼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중세 유럽에서도 1)트리엔트 회의까지 시험결혼은 일반적인 결혼으로 되어 있었다. 시험혼은 결국 보지 않고 결혼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으며 결혼했을 때, 어린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한다. 또는 신랑이 임포텐츠였다고 하는 것 등의 여러 가지 비극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즉, 서로가 잘 생각한 다음에 정식 결혼을 한다고 하는 풍습이었다.
19세기 영국의 요크셔 지방에서는 그대 만약 몸이 불완전하면 나 그대를 반려자로 맞이하지 않을지니.. 서약도 있을 정도였으며, 만약 시험혼에서 딸이 임신하지 못한다면 약혼이나 결혼도 파산이 되며, 또한 남성에게 성적이 능력이 없다면 여자쪽에서 일방적으로 파혼을 제의할 수도 있었다. 기독교의 결혼에서는 한번 성직자의 입회하에서 식을 올리게 되면 설사 불임이나 임포텐츠라도 이혼은 결코 인정될 수가 없었다. 그러한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서도 시험결혼은 의의있는 것이기도 했다.
시험결혼은 아니지만, 16세기의 휴머니스트인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에서 결혼전에는 충분히 서로를 알고 나서 신부를 맞이해야만 된다고 주장했으며, 영국에서는 신부가 권위있는 부인의 면전에서 나체가 되어 품질결정을 받는 풍습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죠 오블리의 (짧은 목숨 ; 1939년 발행)에서는 신랑의 부친이 상대방 신부될 여인의 집으로 가서 완전 나체로 하여 그 육체를 보고 나서 아들의 신부감으로 합당한지를 감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간은 작은 집 한 칸을 사는데도 세심하게 뜯어보고 재는 주제에 일생이 행복과 불행이 딸린 아내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얼굴만 보고 선택하는 것은 우매한 것이다. 토마스 모어가 그의 저서에서 한 말이다.
